캘리포니아 푸룬의 역사
캘리포니아 푸룬의 역사
달콤하고 과즙이 풍부한 푸룬은 여러 세기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푸룬의 시초는 코카서스 산맥과 카스피해 근처 서아시아에서 왔습니다.
그 이후 푸룬용 자두는 서쪽의 유럽과 발칸반도로 전해져 와서 그 재배 방식과 맛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푸룬과 과수원이 오늘날의 명성을 얻기까지는 긴 과정들이 있었습니다.

“황금” 과일 (1850-1870)

캘리포니아 주 초기, 황금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을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원대한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로 왔습니다. 하지만 부자가 되기를 염원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찾던 소중한 황금 대신 실망감과 가난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금을 찾는 것은 그저 부자가 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에 불과하였고,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들은 황금 찾기에만 매달리기 보다는 캘리포니아 주의 끝없이 넓고 풍요로운 땅에 눈을 돌렸습니다.

1850년, 프랑스의 포도 재배자였던 루이스 펠리에 (Louis Pellier)는 미션 샌호세 (Mission San Jose) 근처의 가장 풍요롭고 좋은 땅을 얻어 펠리에의 정원(Pellier’s Gardens)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따스한 햇빛으로 활기 가득한 이곳에서 루이스는 푸룬 재배 방식을 연구하였고, 이곳은 훗날 캘리포니아 푸룬 산업지로 발전하게 됩니다.

접붙인 푸룬(Pruneaux d’Ente)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아쟁(Agen)지역 출신인 펠리에는 과수원 재배 경험이 있었습니다. 형제인 피에르(Pierre)와 함께 그들 형제는 계곡 골짜기에서 자라는 야생 자두나무에 아쟁 푸룬의 대목을 접붙였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펠리에 형제의 인내심이
드디어 빛을 발하여 열매를 맺었고, 캘리포니아 푸룬이 탄생하였습니다.

산업의 시작 (1870-1890)

1880년대 중반 무렵, 사과나 배와 같은 기본적인 과일들의 과잉 공급으로 인해 생산자들이 새로운 대체 방법을 찾으려 하면서 푸룬 산업이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70년대에 유럽에서 푸룬 수입량이 22,000톤 가까이 되면서 깨어있는 생산자들은 시장의 변화를 따라 푸룬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대륙 횡단철도는 대륙을 가로질러 푸룬 시장의 발전에 한몫 하였습니다.

1887년 캘리포니아에서 타지역으로 수출된 푸룬의 양은 46,000톤에 달했습니다. 많은 골짜기 또는 계곡의 환경과 Luther Burbank같은 원예 전파가들이 캘리포니아 푸룬 산업의 엄청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푸룬 농장의 면적이 늘어나는 만큼, 생산지에서 말과 마차로 이동 가능한 거리에 있어야 하는 공정 시설의 수도 함께 늘어났습니다.
1900년 무렵에는 푸룬 재배 지역 곳곳에 약 85개의 포장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오르막길 뒤엔 내리막길 (1890-1920)

세기가 바뀔 즈음에, 앞을 내다보지 못한 많은 푸룬 판매자들에 의해서 캘리포니아 골짜기에 작물 재배 면적은 9만 에이커까지 늘어나 과잉 공급 사태가 심화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인건비도 한몫 했습니다. 1905년 한 생산자는 올라가는 노동 임금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Panama에서 Santa Clara Valley로 500마리의 원숭이를 데려와 푸룬을 수확하게 했습니다. 50마리씩 나눠 사람의 감시 하에 원숭이들이 나무를 흔들어 푸룬을 떨어지게 하는 형식으로 수확이 이루어졌습니다. 원숭이들의 수확 그 자체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수확한 푸룬을 거의 다 먹어 치우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위협은 캘리포니아 주에서 요구하는, 1900년대 초기까지 존재한 높은 품질 기준이었습니다. 미국 동부 지역과 해외 생산자들은 때때로 저품질의 과일이나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된 제품들과 섞어서 다시 포장하여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된 것처럼 팔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제품들보다 더 싼 이러한 제품들은 시장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산업 통일이 가져온 제품의 발전 (1920-1940)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계속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1908년 “캘리포니아 건과일 협회” (Dried Fruit Association of California; 지금의 DFA of California) 라는 판매 계약, 운송, 순식품(pure food) 관련법을 감독할 수 있는 기관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DFA는 수송 전에, 부두에 있는 말린 과일들의 상태를 인증하는 검사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포장, 제조업자들 뿐만 아니라 푸룬 소비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점점 커져 푸룬 품질을 높였고, 20세기에 들어서 혁신적인 기술 발전을 불러왔습니다.

1932년에, 몇 년에 걸친 발전과 실험 후 푸룬 주스가 새롭게 소개되었고, 바로 그 다음 해에, 상자에 포장된 수분이 많고 부드러운 과육을 가진 푸룬이 소개되며 공식적으로 보다 부드럽고, 과즙이 풍부하고, 바로 먹을 수 있는 푸룬이 등장하였습니다.

세계가 전쟁 중일 때 (1940-1946)

전쟁 중에는 무역법이 바뀜에 따라 많은 유럽 국가들이 미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도 푸룬을 수입하기 시작해 캘리포니아 푸룬 산업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수출량이 줄어들 때, 캘리포니아의 푸룬 생산자들은 국내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40년 3월, 소비자들을 겨냥한 대회를 주체해 라디오, 신문, 잡지 광고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사실상 미국이 1941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에 개입하면서, 역사상 가장 많은 건과일이 팔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감안해 보면 전쟁이 일어났던 해는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농장에 일손이 부족했고, 저장할 곳이 제한적이었으며, 사용할 기구들과 상승하는 가격이 수익의 대부분을 상쇄하였고 또 1943년 3월에는 건과일이 배급 포인트로 살 수 있는 배급식량 리스트에 포함되면서 많은 미국 주부들은 제한된 배급 포인트를 건과일이 아닌 다른 곳에 쓰기를 택했습니다.

캘리포니아 푸룬 협회와 기술 (1947-1960)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푸룬 생산자들은 많은 재고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949년 8월, 푸룬 산업의 규모와 생산 수량을 조절하는 정부의 마케팅 협정과, 1952년 

1월에 뒤따라온 캘리포니아 푸룬에 대한 주의 마케팅 지시가 승인되었습니다.

계속 이어진 움직임 중 하나는 무역 홍보, 소비자 광고, 교육, 연구를 통해 캘리포니아 푸룬의 세계적인 수요 증진을 목표로 하는 캘리포니아 푸룬 협회(CDPB)의 설립입니다. 이들 모두 설립 이래로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과수원에는 엄청난 속도로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1929년 캘리포니아 푸룬의 재배 면적은 171,330 에이커였던 반면, 제 2차 세계 대전 영향으로 엄격해진 식품 기준 요건으로 인해 139,000 에이커 정도로 유지되었고 1951년에 이르러 도시화 현상으로 인해 산타 클라라 밸리(Santa Clara Valley)에 있는 과수원들이 밀려나면서 107,000 에이커로 줄어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인건비로 인해 전쟁 전에 사용되었던 수확 방식을 대체할 수 있는, 보다 혁신적인 방식과 기구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생산자들은 나무 가지에서 나무 망치나 고무 망치, 장대를 사용하여 직접 과일을 수확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수확용 기계들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변화의 시대 (1960-1970)

첨단 기술 회사들이 산타 클라라 밸리를 점령하고 이 지역이 “실리콘 밸리(Sillicon Valley)”로 알려지면서 농업이 더는 이 지역의 주된 사업이 아님이 확실해졌습니다. 생산자들도 더 인기있는 과일을 생산하기 위해 다른 캘리포니아 지역을 두드려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과수원들이 산타 클라라에서는 점차 사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크라멘토 밸리(Sacramento Valley)에서는 면적당 생산량 증가가 재배 면적의 손실을 상쇄시키고도 남아 1960년에는 사상 최초로 새크라멘토 밸리의 푸룬 생산량이 산타 클라라의 생산량을 뛰어 넘었습니다. 


생산량 증가와 더불어 캘리포니아 푸룬에 특별함을 더해준 것은 바로 1960년대 초반 씨를 뺀 푸룬을 공격적으로 어필했던 성공적인 테스트 마케팅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가장 인기있는 형태의 푸룬입니다.

메세지 전달하기 (1970-1990)

마케팅은 항상 캘리포니아 푸룬 협회의 우선순위에 있었지만, 1970년대 후반에 줄어드는 판매량으로 인해 임원들은 마케팅 프로그램에 대한 기금을 재정하고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묶어두었습니다. 광고와 전시회, 식품 관련 잡지들의 출간을 재시작 하면서 미국 내와 수출 판매량의 도화선이 되길 기대하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에 콜레스테롤에 대한 우려와 섬유질이 부한 음식에 대한 관심의 증가에 발맞추어 광고, 판매 홍보 활동, 대외적인 활동 시 캘리포니아 푸룬이 고-섬유 과일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 “고-섬유 과일 켐페인”은 마케팅 지원의 증가는 물론 4년 연속 미국 내 수송량의 증가에 큰 몫을 하였습니다.

푸룬이 바라보는 미래 (1990-현재)

푸룬은 단순히 건강하고 영양 풍부한 간식이 아닙니다.
1900년대 연구가 보여주듯이 푸룬 퓌레 (puree)는 빵을 구울 때 지방분을 대체할 수 있고 햄버거 같은 식품의 고기 패티의 수분량과 맛을 높여줍니다.

지난 십여 년 간 캘리포니아 푸룬 사업의 가장 인상적인 발전 중 하나는 미국 내와 해외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활동하는 쉐프들의 푸룬에 대한 평가가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문 요리사와 음식 평론가들은 잘 알려져 있는 푸룬의 건강상 이점들 뿐만 아니라, 푸룬의 좋은 맛, 식감, 풍미에 감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푸룬의 미래는 맛있는 미래가 아닐 수 없겠지요.